[리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를 보고.. 기대를 넘어선 상상의 파격
엄청난 화제와 관심 속에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 (이하 <파>)가 지난 주말
(6월 27일) 드디어 일본에서 개봉했다.
▲ 사진은 개봉일 신주쿠 도큐 시네마 앞 시네시티 광장에서 열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 제3신카부초마치 선언' 행사 중 코스프레 컨테스트 섹션.
이날 상영관 도큐 밀라노 1관 앞에는 새벽부터 팬들이 운집, 1,045석에 달하는 좌석이
연회 매진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애니메이션 부문에선 지난 2007년 첫 번째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
(이하 <서>) 못지 않은 (아니, 훨씬 거창한) 규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덕분에 일본
뿐 아니라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두 번째 신극장판.
과연 어떤 작품으로 탄생했을까. 봐도 봐도 궁금한 에바, '사골게리온'이란 우스운
별명에도 불구하고 정작 외면하긴 힘든 작품이 바로 에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궁금하다.
전체 4부작 신극장판 시리즈 (마지막 두편은 동시 공개 예정) 중 가장 급격한 변화와
전개가 점쳐지는 가운데 드디어 베일을 벗은 신작 <파>를 보러 일본으로 향했고,
에반게리온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영화 팬의 입장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정리했다.
일본 현지에서의 거듭된 감상에 덧붙여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 때문에 놓칠 수 밖에
없었던 부분들은 가능한 모든 네트웍(?)을 동원해서 '보완'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단, 직접 보기 전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스토리는 요약과 생략, 새로움과 강조를
통해 창조적으로 탈바꿈했다는 정도의 언급으로 대신하기로 하자. '네타바레'
(스포일러)가 두렵지 않은 분들을 위해 별도의 포스팅으로 자세한 스토리를 정리할
예정이니 기대(?)하시라.
본격적인 감상에 들어가기 전에 <파>를 보고난 느낌을 한마디로 미리 정리하자면,,,
<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감상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기존 TV 시리즈에서 어떤 부분이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서>의 감상의
가이드라인이었다면, 제작진 스스로 '완전신작'을 표방한 <파>는 원작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찾는 것보다는 <서>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컨셉으로 보는게 편할
만큼 무수한 부분이 축약되고 생략된 반면 거의 전편에 걸쳐 새로운 설정과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완전 신작'이란 표현이 정확하다.
첫 장면부터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에바, 새로운 사도가 등장,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바로 캐릭터의 변화와 드라마의 심화.
주인공 뿐 아니라 조연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원작과의 비교가 무색할 만큼 역할과
인간관계가 변화되었는데, 그 모두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전작에서 에바를 타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신지는 주변 인물들과의 능동적인
인간관계로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핵심적인 위치에 놓이는
인물은 바로 레이. 에바 이후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고착화된 캐릭터에서 과감히 탈피,
신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파>의 드라마에서 핵심에 놓이는 '식사 초대'를
하는 등 인간 냄새 물씬 나는 캐릭터로 진화했다.
아스카 역시 첫 등장 장면에서 기존 에바 월드에서의 역할을 재현하는 듯 하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타인-그것도 레이-을 배려하는 모습이나 미사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 등 역할의 변화에 주목할 만 하다. 특히 삼호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신지와
겐도우의 후반 긴장관계를 한층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여전히 쿨하고 멋진 미사토는 카지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들이 대폭 추가됐고, 원작을 능가하는 능력을 선보이며 인류보완계획의 핵심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카지는 수수께끼 매력에 확실한 능력을 보태 조연 중 가장
인상적인 위상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리고 마리. 쿨하기 그지 없는 성격에 독단적인 것 같지만 미사토 뺨치는 탁월한
상황 판단과 기지는 클라이막스 액션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그녀를 자리매김하고,
대사 하나하나에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설정은 마치 다른 에바 캐릭터들에게 모자란
매력들을 그녀에게 '보완'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녀를 연기한 성우 사카모토 마아야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는 적역이란 평가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스타일의 캐릭터를 에바 월드에 추가했다.
개봉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지만, 에바 관련 캐릭터 산업 분야의 '써드 임팩트'는 확실히
마리에 의해서 일어날게 분명해 보인다.
<파> 캐릭터의 파격적인 변화는 최근 '캐릭터'란 단어를 사용하기 무색할 정도로
몰개성한 주인공과 공식화된 억지 설정이 고착된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트렌드를
거부하는 건전한 시도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TV 시리즈에서 구극장판, 첫 번째 신극장판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선보일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비주얼 역시 <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파격을 선보인다.
업계 자체에 각성을 몰고 왔던 TV 시리즈(95~96년)나 실사와 특촬 분야의 라이브한
감각을 스크린에 풀어낸 <THE END OF EVANGELION>(97년), 그리고 원화 단계에서
전면 수정한 100% 신작화와 CG의 현명한 활용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의 2D와 3DCG의
황금 배율을 선보인 <서>에 이어 <파>의 비주얼은 파격적인 앵글과 무시무시한 스피드,
제작에 참여한 크리에이터들의 전작까지 아우르는 풍부한 인용 (당연히 GAINAX의
<건버스터> 시리즈 등이 포함된다), CG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미증유의 체험'이란
제작진의 호언이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캐릭터 작화는 시종일관 하이 퀄리티로 깔끔하게 업그레이드한 <서>의 작풍에 작화
감독들의 개성이 좀 더 반영된 인상. 개인적으론 살짝 불만인 부분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작풍이 아닌 작화 퀄리티엔 한 치의 허술함도 없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좀 더 긴 얼굴에 눈은 둥글둥글하고 크게 표현되었으며 신지를 비롯한
레이와 아스카의 경우 14살 소년 소녀라는 설정에 걸맞는 몸매로 튜닝된 모습.
상반신 속옷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아스카처럼 (관점에 따라) 노골적인 장면도 다수
등장하지만 섹시하다기 보단 실제 그 나이 또래의 자연스런 행동으로 느껴지도록
그려졌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제작진은 <서>에서 신지가 목욕탕에서 펜펜을 보고 놀라는
장면을 아스카 버전으로 반복 패러디 서비스, 서비스 컷과 유머 같은 상업적인 배려
역시 듬뿍 집어넣었으니까.
안노 히데아키 총감독은 예전부터 영상의 라이브한 감각을 중요시하기로 유명한데,
원작에서부터 강조된 특촬 장르의 감수성이나 최신 트렌드의 반영이 훨씬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너무 빨라서 처음엔 어리둥절하지만 동시에 밀도 높게 압축되어 있어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싶을 정도.
타이틀도 뜨기 전에 여보란 듯이 등장하는 가설5호기와 제3의 사도와의 전투 씬이 2D와
3D 랜더링의 절묘한 접합점을 확인시켜 준다면 헐리웃의 대작 3DCG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된 감수성으로 표현된 3D 그래픽을 통해 등장하는 사도와 에바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서>에서 제6의 사도(TV판의 라미엘)가 보여준 기하학적인 매력을 확대시켜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로는 절대 재현할 수 없는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완성된 사도들은 개러지 키트를
포함, 모델러들에겐 가혹한 도전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신극장판을 평가할 땐
'새로운 캐릭터, 에바, 결말' 컨셉에 '새로운 사도'를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도와 에바와의 전투는 등장 타이밍과 대결에 참가하는 에반게리온이 드라마 전개에
철저하게 부합되도록 계산되어 시종일관 액션의 라이브한 감각으로 충만된 작품이 됐다.
특히 '제10의 사도'와의 전투는 TV 시리즈에서도 제작진이 야심차게 준비한
클라이막스(제19화 '남자들의 싸움')이었는데, <파>에선 아예 다음편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열쇠가 된다.
원작의 이미지를 간직하면서도 파격으로 기우는 클라이막스 전투 장면은 막강 사도의
위력에 에반게리온이 각자 다른 모습으로 처절하게 희생당하며 보는 사람의 감정 또한
극한으로 치닫도록 만드는 에스컬레이션 구도가 절묘하달 수 밖에.
<파>에서 등장하는 사도와 에바의 또다른 설정과 가차없는 스피드와 잔혹한 묘사로
펼쳐지는 전투 액션은 거부할 수 없는 쾌감으로 가득하다.
전편에서 '전봇대는 이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려깊게 묘사됐던
제3신동경시의 디테일도 여전하다.
특히 사기스 시로의 새로운 스코어와 함께 펼쳐지는 도시의 아침 씬은 자연스레 캐릭터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동시에 제작진 스스로 그리고 싶었던 장면을 그린 듯한 압도적인
작화에 빠져들게 한다. '사도가 나타날 때마다 형편없이 파괴당하는데 언제 또 저만큼
복구됐지'라는 부분만 너그러울 수 있다면, 관객 자신이 살고있는 도심의 일상이란
기묘한 현실감까지 느낄 만큼 세계관에 부합되는 세심한 묘사에 감탄을 아낄 필요가
있을까.
확실히 이 부분은 극장에서 가급적 큰 스크린으로 즐겨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서>의 장점이 확대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서>에서 봤던 장면이 의도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펜펜을 보게된 아스카의 노출
서비스 컷과 빨대 가리기 신공 이외에도 옥상에서 음악을 듣고있는 신지, 전철 안에서의
묘사, (결정적으로) 클라이막스에서의 '손 장면' 등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 익숙하게 재등장(하지만 확실하게 변주)한다.
이는 신극장판부터 에바를 접한 팬들에 대한 배려이자 기존 골수팬들에게도 TV 시리즈의
뱅크 컷을 보는 듯한 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또 하나 개봉 이전에 공개된 에바 가설5호기나 신지 일행의 사복 버전 이외에도 영화
속에서 처음 공개되는 설정의 풍부함은 관객들에겐 신극장판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는
한편 작품 외적으론 활발한 라이센싱과 캐릭터 상품, 개러지 키트와 피규어 등
산업적인 측면에 대한 배려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음악과 음향효과는 <파>의 또다른 얼굴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보여지는 스튜디오 카라의 로고에 음향이 첨가되었는데, 오래된
특촬 영화의 촌스러운 음향효과를 연상시키는 생경함이 인상적이다. 영화 속 새로운
장면에 걸맞게 작곡된 새로운 스코어 넘버들은 OST 발매(7월 8일)를 설레이며
기다리게 할 만큼 임팩트가 강하다.
테마송은 개봉일에 공표된대로 우타다 히카루의 <서>의 엔딩 테마 'Beautiful World'가
'PLANiTb Acoustic Ver.'으로 다시 쓰였는데, 리메이크 버전의 서정적인 측면은
사기스 시로의 신악곡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음향효과 측면에서 <서>의 제6의 사도과 관련해서 개발된 음향 만큼 임팩트 넘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많아진 전투 씬 만큼이나 재미있는 장면들도 늘어났단
점은 확실. 후반부 두 번의 하이라이트 씬에는 스코어링 대신 두 곡의 삽입곡이
사용되었는데, 카라의 로고 음악 때 느껴졌던 생경함이 증폭시킨 듯 느낌이 묘하다.
이 부분은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하게 구분될 듯.
(적어도) 팬들에겐 그 어느 때보다 전략적이고 활발한 홍보/마케팅과 커피에서 핸드폰,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객층을 흡수하려는 노력이 돋보인 프로모션으로
절정에 달한 팬들의 기대를 넘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와 충격효과로 또 다음편을
기다리게 만들어낸 노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타인과의 소통,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원래도 통화 씬이 많았지만
<파>에선 NTT docomo와의 협력 관계를 의식해서 드라마틱한 장면에 전략적으로
PPL이 활용되었고, 장면에 따라 강도는 다르지만 UCC 우에시마 커피, 파나소닉
노트북 '레츠노트', 로손 등 다양한 브랜드가 효과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이번 주말 <파>의 흥행 성공에 미소짓는 사람은 비단 제작자 뿐만이 아닐 것이다.
<파>는 개봉 이전 마케팅을 통해 이미 산업 자체에 긍정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컨텐츠라는 점을 증명했고, 이의 확대 재생산은 이제 '우려먹기'가 아닌 또다른
크리에이티브로 인식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관점에선 확실히 '재미있다'는 장점으로
수렴되고, 관객들이 수용하는 재미는 작품 속 모든 변화가 지향하는 '성장과 소통의
이야기'로 다시 한번 반사된다.
은근슬쩍 자신의 주장을 팬들에게 설파하는 고단수 커뮤니케이션 전략, 안노 히데아키가
'우리는 또 다시 무엇을 만들려 하는가'라는 긴급성명에서 천명했던 신지의 이야기는
이제 올 여름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됐다.
팬심을 읽고 작품에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싶은 이야기와 소망을
담아내는 폭발적인 창조력. 이 창조력은 위기에 빠진 애니메이션을 구원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파>를 넘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을 계속 궁금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